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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감상문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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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분기 청운 독후감상문 우수작품(3학년 대상)
작성자 심가양 등록일 16.11.10 조회수 843

2016학년도 2/4분기 청운 독후감상문 우수작품(3학년 대상)

 

 

<인간의 역사 - 인간성과 인문학, 그리고 미래>

 

3학년 김OO



1. 서론 : 인간을 새롭게 바라보기

 

 ‘인간의 뇌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가장 큰 어려움은 그 유일한 수단이 인간의 뇌라는 점이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말이다. 사실, 굳이 우리의 뇌가 아니더라도 인간으로서 우리 인간을 연구하기란 그 연구 방향 설정에서부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며, 나의 짧은 독서 경험을 통해 지금까지 알게 된 바로는 그것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자신과 사회에 대한 깊은 사색을 바탕으로 한 철학적인 접근이요, 다른 하나는 생물학적 분석을 전제로 한 과학적 연구이다. 전자는 줄곧 인간만의 특별함을 그의 사고능력과 정신적 가치 창조 능력에 기대어 입증해 내려 하는 반면, 후자는 냉정한 시선으로 인간이라는 특이한 생물체를 - 특히 뇌에 초점을 맞추어 - 파고든다. 다만 이 두 가지에는 공통된 문제가 한 가지 존재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어디까지나 ‘현재적인’ 탐구일 수밖에 없다는 것, 즉 달리 말하면 ‘지금 여기 있는 하나의 인간’을 떠올리는 것으로부터 출발할 뿐 그 기원과 변천과정에 대한 관심을 다소 배제한다는 점이다. 만약 기꺼이 양보하여 수천 년, 혹은 수만 년의 세월을 고려했다고 인정해 주더라도, 그들이 바라보는 대상은 여전히 현생 인류, 호모 사피엔스에 그치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실질적 연구대상은 호모 사피엔스이며 우리 또한 그것의 일부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종래의 방식들은 - 마치 태양이 유일한 항성이라는 믿음처럼 - 호모 사피엔스 이외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애초에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저자의 인간 종에 대한 종합적 태도를 ‘역사적 접근’이라는, 기존의 방식들에 대해 보완적인 맥락으로써 이해하고자 하며, 그럼으로써 알 수 있는 인간성의 새로운 측면과 그 반영을 역사 속에서 고찰한 후 이를 심화시켜 ‘인간의, 인간적 태도로의, 인간에 대한 학문’이라 할 수 있는 인문학에 대한 탐구를 중심으로 인간적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려 한다.

 

 

 

2. 첫 번째 : 역사적 접근의 함의 찾아내기

 

 앞에서 언급된 ‘역사적 접근’의 핵심은 그 현실성과 자연스러움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탐구의 대상을 그의 존재의 과정을 통해 파악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단계와 사실들을 빠짐없이 고찰하게 해 준다는 장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단계들의 연속성과 영향 관계를 흐름에 따라 이해하게 해 준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중대한 역사의 순간에 ‘혁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중 대표적인 것 중 하나인 ‘과학혁명’에 대해서도 여전히 일각에서는 그 전 사회풍조와 종교적 도그마로부터 비롯된 정신적 맥락에 따라 이해할 경우 그것은 어디에선가 갑자기 나타난 무엇이라고 불릴 수많은 없다는 식의 주장을 펴기도 한다. 요컨대 이처럼 역사란 것은 고정적 실체와도 같은 여러 사건들의 병렬이라기보다는 탐구의 초점에 따라 나타나 보이는 하나의 납득할 만한 ‘흐름’이라고 보는 것은 충분히 합리적일 수 있으며, 저자가 굳이 인류를 ‘호모 사피엔스’로 묘사하여 그 뿌리에서부터 살펴본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나는 이 ‘흐름’을 크게 다음의 세 가지 핵심적인 부분에 초점을 두고 살펴봄으로써 종래의 인식에 대한 재고와 보완을 시도하였다.

 

 

 (1) 첫째는 인간 본연의 ‘현실적인’ 위상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나는 역사적 접근의 핵심 용어로써 현실성이라는 단어를 선택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진실된’,‘실질적인’, 혹은 ‘근본적인’ 과 같은 표현들에 비해 실제로 일어난 그대로의 사건의 과정을 강조하는 동시에 이 주제를 바라보는 우리의 주관적인 기준과 감상을 최대한 자제시키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첫 번째 지적의 핵심은, 인간과 동물 사이에 함부로 선을 긋는 행위 - 그것이 어떤 학문적, 사상적 기준을 담고 있든지 간에 - 는 자칫 인류의 본원적 속성을 이해하는 데에 무리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적지 않은 경우에서 우리는 인간만이 생각하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더 나아가 동물은 느낄 수 없고, 실질적 의미에서 소통할 수 없으며, 생존 본능에 의해 움직일 뿐이라는 데카르트적 사고방식을 우리 자신에게 강요함으로써 인류의 고귀한 배타적 위치를 확보하려 한다. 물론 우리는 상식적으로는 인간도 동물의 한 부류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나 여전히 인간은 ‘조금 더 특별한’ 동물이라는 논리에 의해 무마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에 대한 저자의 대답 - 우리는 ‘다양한 인간’ 중 하나인 ‘호모 사피엔스’이다 - 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을 조금 더 상대적으로, 다시 말해 ‘유인원-다양한 인간 종 - 호모 사피엔스‘ 라는 연속적 과정을 통해 우리 자신을 ’갑자기 창조된 신의 산물‘이 아닌 ’자연스럽게 진화한 나름의 동물 종‘으로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이것을 전제하는 순간, ’인간만의 특성‘으로 치부되었던 몇몇 사항들은 위기에 봉착하게 되며, 또한 반대로 동물적 속성의 일부는 인간에게도 여전히 유효함이 납득될 수 있다. 예컨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우리의 사회는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달되었다고 하여 유인원의 ’군집‘은 ’사회‘라고 보기에는 부적합하다는 식의 배타성이 잔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이어져 나온 것이며 그들은 우리의 기원이기 때문이다. 개체 각각의 정서적 측면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영장류의 스트레스와 정서적 반응에 대한 내용은 이미 검증된 사실이며, 동물간의 상호작용이 식욕과 성욕만을 직접적으로 전제하는 충동적 행위라는 주장은 전적으로 우리의 독단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사실 우리는 어렴풋이나마 이러한 정보들을 인식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순전히 현재적인 관점에 의존하며 보다 ’인간적이고 동물과 다른 고귀함‘을 바라는 중에 우리는 그들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려는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이는 우리가 인간의 형성 과정과 다양한 종의 가능성을 간과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측면에서 저자의 분석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연속적인 관계를 인정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합리적으로 최소화시키는 한편 동물에 대해 그저 ’무시의 대상‘으로 일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2) 두 번째는 인간 스스로 창조하거나 발현시킨 인간성, 곧 문명에 대한 것이다. 특히 문자와 화폐는 역사 시대의 시발점이자 적어도 대부분의 문명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이며, 그 창조 과정 혹은 결과에 초점을 둠에 따라서 인간성에 대한 참고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여기서는 문자와 화폐의 ‘필연성’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며, 이는 그들이 탄생의 배경과 본질적 특성이 어떠하였던지 간에 최종적으로 지금의 우리를 만든 것들이라는 대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문자의 경우,  저자는 그 특성에 있어서 ‘인간적 세계 인지 방식에 맞지 않는 고착화된 시스템’ 이라고 묘사하였다. 애초에 주변 환경을 전체적으로 인식했던 원시인의 시각적 습관과 달리 문자는 기본적으로 모양이나 숫자를 추상화, 객체화 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렇게 세계를 서로 다른 개체들의 집합으로 파악하게 되면서 관료체계를 비롯한 위계질서의 개념이 싹트게 되었다고도 한다. 이것은 곧 언어, 더 정확히는 문자의 개념이야말로 인간의 정치적, 철학적 사유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부분임을 암시한다. 나는 언어의 탄생배경 보다도 그로 인한 인간 의식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을 분석한 저자의 의도와 그 결론에 대해서 대체로 동의한다. 대상의 명료한 표시와 지칭을 바탕으로 일차적으로 고안된 문자가 고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 사유의 근간에 자리하게 되었다는 것은 전적으로 타당한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그렇다고 해서 문자의 특성과 배경이 ‘인간의 본연적 지각 방식’에 위배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저자의 주장의 큰 맥락에는 동의하되 그것을 조금 더 수정하여 핵심을 말하자면 문자란 ‘우리 의식의 한 중요한 부분을 극단적인 방향으로 확대, 발전시키기 위해 우리 스스로가 개발한 촉진제.’이라고 생각한다. 일례로 철학자 베르그손은 자신의 저서 ‘창조적 진화’에서 인간 의식에 대해 ‘분절된 여러 개의 대상들의 조합과 관계에 집중하여 환경을 파악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는데, 나는 이러한 주장이 비록 19세기의 한 개인의 사색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도 사실은 애초부터 우리에게 유효하게 적용되는 것이라고 본다. 저자는 원시인의 경우 현생 인류에 비해 보다 넓은 시야와 지각능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환경을 ‘스캔’하듯이 살피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게 되면 우리는 결국에 이것 또한 여러 개의 객체들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된다. 제 아무리 원시적 상태에 있었다고 한 들 인간이라는 동물에게 있어 시각의 기능은 결국 생존에 필요한 사냥감과 피신처를 찾아야 한다는 목적에 결부되어 있었을 것이며, 이것은 예컨대 한 마리의 사슴이나 한 개의 동굴을 인지하지 않고서는 발생할 수 없는 것이다. 베르그손이 주장의 핵심으로써 언급한 ‘유용성에 따른 지각과 판단’은 이러한 인간의 근본적인 생존 특성을 염두 해 둔 것이라 생각하며, 문자는 이러한 본능이 강조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명되었다가 결국에는 역으로 본능의 발달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요컨대 처음에는 외적 목표 달성의 용이함을 위해 개발된 보조 수단으로써의 문자는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의 두뇌 속에 그 자체로써의 체계를 확립하게 되고, 그로부터 체계적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의 사유 형식이 발현되면서 이제는 인간은 내적 목표를 위해 그것을 더욱 잘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문자는 일면 우리에게 잠재되어 있던 특성을 끄집어 낸 도구이면서도 어떻게 보면 우리의 태도를 특정 방향으로 이끌어 과거와는 사뭇 다른 인간성을 만들어낸 원인일 것이다. 

 화폐의 경우, 그것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척도’이자 ‘기준’이며,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에 맞추어 해석한다면 하나의 ‘매개’이다. 물물교환에 의존하던 인류가 어떻게 해서 체계적이고 보편적인 통용의 기준을 마련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과정을 생략하고서라도, 결과적으로 화폐는 ‘관용과 왜곡의 양면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인상이다. 먼저, 화폐는 모든 통용되는 물자를 단 하나의 보편적인 방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점에서 무한한 관용과 협력, 이해의 의지를 내포하고 있는 수단이다. 대상과 대상 사이의 공통된 속성을 발견하게 되면 처음에 낯설게 보였던 것들조차도 새롭게 바라보게 되는 인간의 특성상 모든 물자가 단일한 방식에 의해 가치를 드러낼 수 있다는 점은 단순히 집단 간의 교류의 가능성을 넘어 자연스럽게관계와 이해의 발전에도 기여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인간이 서로를 대함에 있어 그 사람 자체를 알아가기에 앞서 종교, 부족, 언어 등 다양한 척도를 통해 나름의 인식의 틀을 마련하듯이 화폐의 경우에도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칫 왜곡과 맹목의 원인이기도 한데, 문자의 단점과 비교하여 설명하자면 그것은 특히 인간의 외적인 측면을 지배하고 고착화시키는 하나의 도그마이다. 앞서 문자에 관한 내용에서 우리는 그것이 위계질서에 대한 집착의 근거로 작용할 수 있음을 보았는데, 그것이 주로 내적인 측면에 대한 것이라면 화폐의 경우에는 모든 고려의 대상은 경제적 가치에 의해 명확하게 인식될 수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화폐의 축적과 그 가치에 대한 신봉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앞서 나는 화폐를 ‘매개’로써 표현한 바 있는데, 매개란 두 개 이상의 대상들의 중간적 입장에서 상호작용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화폐의 긍정적 측면에서와 같이 이해와 협력을 용이하게 하면서도 한편으로 그 부정적 측면에서처럼 매개 자체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질 경우 어느 대상의 본질에도 다가가지 못하고 불분명한 상태에 머무르게 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요컨대 돈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 수는 있지만 돈 그 자체에 대한 분명한 가치 인식을 갖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또한 매개는 어디까지나 중간적인 역할을 담당할 뿐, 인간적 작용의 진정한 목표가 대상에 대한 본질적인 인식에 있다면 화폐라는 외적으로 부여된 인공적 기준에 의존해서는 인식의 범위가 근본적으로 한정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처럼 문자와 화폐는 문명의 발달과 그로 인한 인간성의 변혁과 그 역사를 함께해 왔으며 그들의 인간에 대한 내,외적 영향은 심층적이면서도 분명한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3. 두 번째 : 학문에 인간성을 적용하기

 

 앞선 논의를 통해, 곧 인간에 대한 역사적 접근 방식을 고찰함에 따라 우리는 ‘인간적인 것’과 그에 영향을 미친 요소들에 대한 짧은 핵심들을 살펴본 바 있다. 요약하자면 인간은 동물적 속성을 유지하되 발달된 사고를 바탕으로 문명을 건설한 종족이며, 이때 사고-학문의 기반-의 형성에 있어 문자와 화폐는 인간의 생존 본능과 유용성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보다 명확한 세계인식을 위해 객체적인 인지방식 및 보편적 척도의 확립을 통한 개념과 위계의 형성을 주도하였다. 나는 지금부터 이러한 요소들이 인간의 지적 관심과 학문의 역사 속에 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를 저자의 관점을 고려하여 살펴봄으로써, 궁극적으로 인문학의 본질과 방향에 대한 참고 또한 얻고자 한다.

 

 

 (1) 유용성과 학문의 발생

 

 과학기술이 독보적 입지를 확보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편견 중 하나는 기술과 과학이 본래 크게 다를 바가 없으며 기본적으로 불가분의 관계라는 생각이다.예컨대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바라봄에 있어 우리는 줄곧 고대인의 뛰어난 ‘과학 기술력’을 찬양한다. 그러나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이는 지극히 현재의 입장에서 본 것이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더라도 우리는 그들이 공사에 동원되는 각종 기술에 대한 ‘학문’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 ‘아니다’라는 대답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들은 단지 스스로 터득한 기술을 숙지하고 있었을 뿐, 우리가 현재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 - 이를테면 힘의 합력, 중력 법칙, 일의 양 - 으로 모든 과정을 체계화하지는 않은 것이다. 기술과 학문의 경계가 가장 모호한 과학에서조차 이렇게 드러나듯, 본래 ‘학문’이라는 것의 의미는 단순히 ‘인류가 축적해온 지적인 것들‘로 완전히 표현될 수는 없으며, 무엇보다도 인간에게 있어 기초적인 ’생존 본능과 유용성의 충족‘이라는 원칙을 직접적으로 만족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고유한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학문의 시초로써 가장 적합한 사례는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의 근원이 되는 무언가(arche)를 탐구하고자 각자 자신만의 이론을 펼친 철학자들에 대해 우리는 그들이 직접적인 유용성 혹은 생존에 도움이 되는 것을 추구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세계의 근원이 물이냐 불이냐 하는 것은 그들의 생존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들은 단지 ‘세계에 대한 관심’에 의해 탐구했을 것이며 우리는 이것을 지적인 호기심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또한 학문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한 마디 말이나 모호한 생각이 아닌 나름의 내적 ‘체계’를 갖추어야 함이 분명하기에, 우리는 문자가 있어야 비로소 이것이 가능했을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효과적인 지칭 수단이자 개념의 확립에 필수적인 문자 없이는 애초에 “~는 ‘무엇’인가?”라는 식의 질문을 던짐에 있어서도 그 ‘무엇’을 가리키기조차 힘들었을 것임은 물론 개념간의 위계 또한 확립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문자 기반의 사고방식의 근원은 우리가 이전에도 살펴보았듯이 유용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기본적 특성에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것을 학문의 성립에 있어서의 일종의 아이러니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유용성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에 순환적인 혼란이 발생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생존을 위해 바깥을 바라보던 방식으로 우리 자신 안에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는 그를 바탕으로 다시금 바깥 세계를 바라보되,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차분하게 보고자 하는 상황에 있다. 결국 학문이란 두 개의 세계, 곧 우리의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며, 전자가 결여된 경우에 있어서는 우리는 그를 세계에 맹목적으로 적응해 나갈 뿐인 ‘생존하는 개체’로밖에 볼 수 없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학문을 ‘인간이 두 개의 세계의 의도적 대립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창조해 나가는 활동’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인간은 동물과 차별된다.’라는 말 - 만약 굳이 이 말을 인정할 수 있다면 - 의 핵심이 현실에 대한 욕구의 실현능력 혹은 생명 간의 위계질서가 아닌 학문 능력의 유무에 있음 또한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앞으로의 논의는 위의 내용에 의해 자동적으로 생겨나는 문제점 - ‘유용성’에 대한 보다 명확한 설명, 종교, 신화 등에 대한 학문적 관점에서의 설명 - 들을 해결하면서 논의의 목적인 인문학으로의 접목을 시도할 것이며, 논의의 편의와 핵심에의 집중을 위해 ‘학문’의 개념을 주로 자연과학으로서의 의미에서 사용하고자 한다.

 

 

 (2) 종교와 신화 그리고 학문

 

  “아인슈타인의 예측이 정확히 실현되는 광경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은 주인공의 운명을 맞이하는 극장의 관객들과 같은 그 무엇이었다.” - 화이트헤드가 근대과학의 기원을 설명하던 중에 사용한 표현이다. 인간에게 ‘개념과 위계’에 대한 인식이 싹트기 시작함과 동시에 성립되기 시작한 인간성의 핵심을 반영하는 주제들임에도 불구하고, 종교와 신화는 과학에 근본적으로 대립적이라는 생각은 우리로 하여금 위와 같은 비유가 낯설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과학과 종교를 그 목적과 방식뿐만 아니라 그 기원에서부터 함께 살펴볼 경우 그들은 ‘인간적’이라는 주제에 대해 명백히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그렇기에 과학에 대해 논의하기에 앞서 아래의 과정은 필수적으로 거쳐져야 할 것이다. 더불어 논의의 결론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이것이 ‘현재 인문학의 근본적인 위상에 타격이 가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의 설명에 도움을 줄 것으로 본다.

  먼저 발생의 측면에서 살펴보자면, 종교와 신화는 인류에게 있어 일종의 ‘근원의식’으로써 가장 초기적인, 그러나 근본적인 형태의 세계 인식 방식을 내포하고 있다. 그들은 ‘신’을 비롯한 고유의 개념들을 이용하여 적어도 그 시대의 관점에서 바라본 합당한 ‘외부세계에 대한 설명’을 시도한다. 강력한 종교와 믿을 만한 신화는 사람들의 세계관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며, 이것은 사회적 측면에서는 다수의 자발적인 협력과 문명의 창조를 돕는다. 예컨대 유수한 고대의 유적들의 경우 굳이 실용적이기 보다도 종교적 목적으로 설립된 것이 대다수이며 그 규모와 특징으로 보았을 때 단순히 지도자의 명령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종교적 세계관에 의해 다수의 참여가 의도되고 정당화되었을 것이다. 또한 가장 대표적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의 경우만을 살펴보더라도 우리는 현재 서구 세계의 사상과 문화, 언어의 기반이 된 그것의 보편적 영향을 실감하고 있으며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치는 이상 우리는 문명의 성립과 발전에 있어서 종교와 신화는 가히 필수적이었다고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여기서 발생하는데, 그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신화와 종교의 보편적 위력과 문화적 영향에 대해서는 인정하되 그 이상, 이를테면 ‘과학적 사유의 기반’과 같은 다소 이질적인 부분에까지는 융합의 지평을 확대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명목상 인간의 ‘근원 의식’이면서도 종교와 신화는 적어도 과학의 지배하에 있는 현재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인간 문명의 절반도 체 설명하지 못하게 보이는 것이며 과학 그 자신에게 있어서도 이는 그 근원을 이해하는 데에 심각한 장애가 됨이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부분은 명확해진다. 신화와 종교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근원적 인식이라면 과학의 탄생과 발전에 있어서도 그들은 분명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임이 분명하기에, 과학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신화와 종교를 언제까지나 ‘문화적 가치가 있는 과학적 허구’로 바라볼 수만은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일신교와 과학의 근원의 연관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요약하자면 애초에 ‘신’ 과 ‘진리’는 인식적인 측면에 있어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언어로 쉽게 형용하기 힘든 그 무엇’이라는 뜻으로써 종교적 세계관을 통해 설명하든 과학적인 증명을 시도하든 기본적인 세계에 대한 태도와 관점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뒤에서도 언급될 내용이지만, 이 지적의 핵심은 근대 과학의 근간을 마련한 ‘과학 혁명’의 기본적 측면들을 살펴볼 때 더욱 잘 드러난다. 사실 신화(이하 종교도 포함)와 과학은 그 목적에 있어 근원적인 무언가를 탐구한다는 맥락에서 유사할 수 있지만 그들이 탐구의 방식은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신화의 경우 모든 결론을 내리고 세계에 대한 설명을 은유적으로나마 완료한 상태에서 출발하여 그 이후 세부적인 반박이 제기될 경우 설명해 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반면 과학은 ‘알고 있는 것’에 대한 냉철한 한정을 바탕으로 우리의 부족함을 인정한 후 궁극을 향해 나아가는 식이기 때문이다. 과학혁명이 있기 전까지 ‘무지’와 ‘지식의 불완전함’은 성립할 수 없었으며 그 이후에야 ‘모르는 것’을 알아나가기 위한 시도 속에서 ‘진보’라는 개념이 싹틀 수 있었다는 저자의 주장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까지 이르렀음에도 아직 우리는 둘의 명확한 연결을 발견하기 전이며, 대부분의 경우 이 시점에서 종교와 과학이 대립적이라는 결론이 내려지면서 문제가 되풀이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논의를 끝내기에 앞서 다시 첫 번째 가정, 곧 종교와 과학이 동일한 맥락상에 있다는 문장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이상의 논의에서 분명 과학의 진행방식은 신화와 엄연한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그 맥락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우리는 간과하기 쉬운 한 가지 물음을 발견한다: “무엇이 불완전한 상태의 과학을 진보로 이끄는가?” 그리고 이에 대한 해답은 명백하다. 신화에서 ‘신’이라 불리던 것은 과학에 와서는 자연히 ‘진리’의 모습으로 형태를 바꾸어 그 인식적 근원은 유지한 체 새롭게 녹아든 것이다. 이쯤 되면 화이트헤드의 말은 우리에게 있어 핵심적인 지적으로 다가오게 되며 과학은 그 ‘불완전함’을 전제할 때부터 이미 ‘믿음’이라는 요소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었음이 드러나게 된다. 요컨대 과학과 종교는 그것을 창조한 인간의 관점에서 언젠가는 불가분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며 과학을 비롯한 학문의 발전을 다룸에 있어 인식의 근원인 신화를 간과함은 학문의 기본적 원동력을 편협한 시각으로 이해하겠다는 식의 행위 이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3) 과학의 발전 : 객체화와 보편적 척도 부여

 

  이로써 지금까지의 기초적인 논의들을 거쳐 우리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인 ‘자연과학(근대 학문)에의 인간성의 반영과 인문학의 재고’에 접근하였다. 여기에서는 우선적으로 과학의 발전 에 초점을 맞출 것이며, 이후의 장에서 비로소 인문학에 대한 직접적인 논의를 진행할 것이다.

 

  먼저, 과학은 학문 중에서도 ‘객체화’의 의미를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한 학문이라 할 수 있다. 과학은 요소와 요소 간의 명확한 작용의 관계를 규명하는 데에 대부분의 노력을 기울이며 연구 대상 설정에서부터 이미 고도의 정밀성과 객관성을 추구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예컨대 화학작용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원자와 분자에 대한 명확한 실체 규명이, 물리학에서는 힘의 크기와 방향 등이, 생물학에서조차도 세포와 신경망에 대한 분명한 구분이 요구되는 것이다. 물론 뒤에서도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과학의 분절성이 언제까지나 우리에게 긍정적인 측면만을 가져다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근대 과학의 혁명의 토대는 바로 이 객체와 객체의 분명한 구분이라는 수학적인 생각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과학적 사유의 토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데카르트에 대한 언급이 필수적일 것으로 보이는데, 요약하자면 그는 일차적으로 탐구에 앞서 정신과 물질을 완전히 분리함으로써 탐구자로 하여금 외부 세계를 하나의 가분적 물질 덩어리로 취급할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어 분석적, 해석학적 사유의 틀을 마련한 철학자이다. 더불어, 그가 고안한 직교좌표계는 - 베르그손이 지적하였듯이 - 변수 간의 관계를 평면상에 선형으로 표현하는 이론을 마련하여 기계적 관계에 시간성을 도입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여기서 내가 언급하고 싶은 점은 좌표계가 암시하는 과학적 탐구에서의 객체성의 추구이다. 물론 실수 좌표계에서 하나의 점이 취할 수 있는 위치는 사실상 무한개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실수축 자체가 연속적으로 이루어져 있고, 수학적 공리에 따라 하나의 점은 위치만을 가질 뿐 넓이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핵심은 좌표계를 고안할 당시의 개념적 기반이 되는 아이디어에 있다. 애초에 가능한 위치의 가짓수를 떠나서, 궁극적으로 평면상에 하나의 개체(점)의 위치를 숫자의 대응 관계로 ‘명확하게’ 나타낼 수 있다는 점은 그것이 비록 연속적인 환경을 가정한다 하더라도 분절적이고 기계적인 여지를 내포하고 있다. 또한 연속성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이해에 바탕을 두 개념이기에, 실제 좌표평면을 표상하는 우리의 두뇌는 가시적인 형태, 곧 격자 문양의 평면에 나타나는 유한한 칸들을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것은 대상을 ‘단순 정위를 점유하는 물질’로 표현하려는 근대 과학의 특징을 드러내는 내용이며, 수학적 방법론과 접목되어 근대 과학이 실용적 기술의 측면에서나, 측정의 측면에서나 발전하는 토대가 된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양자역학과 같은 물리학의 새로운 측면을 비롯하여 생물학의 난제들이 발생하면서 이와 같은 기계적 사유 - 우리의 직관에 부합하며 분절된 대상들의 관계로 파악하는 방식. 극단적인 경우 결정론으로 이어진다 - 의 한계점들이 드러나고 있는데, 혹자는 여기서 인문학적 사유를 대안으로써 제시하기도 한다.

  고전 물리학의 정점으로 평가받는 뉴턴의 중력이론에서, 중력은 질량을 가진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하나의 관계로써 설명된다. 우리는 여기서 ‘두 물체’라는 말에서 곧바로 방금 언급되었던 객체성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다음 문제로써, ‘두 물체’는 정확히 어떤 것인가라는 의문이 발생한다. 결론적으로 그들은 ‘질량을 가진 임의의 두 물체 m1과 m2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들은 하나의 사과, 컵, 책상이기 보다는 ’질량이 ~kg인 물체‘로 나타내어진다. 왜냐하면 중력의 작용을 설명하기 위해 굳이 그것이 과일인지, 건물인지, 혹은 행성인지는 계산에 있어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지난 논의에서 화폐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던 것과 비슷한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외적 척도의 부여‘이며, 화폐의 경우 다양한 대상의 공통점을 형성하고 그들 간에 관계를 맺도록 도와주는 매개가 되는 한편 대상의 고유성을 왜곡하고 척도 그 자체에 집착하게 할 우려를 발생시킨다는 점을 살펴본 바 있을 것이다. 이것은 물론 과학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만유인력을 예로 든다면, 그 뜻은 ’모든 물체가 가지고 있는 끌어당기는 힘‘이다. 만약 사과와 지구, 지구와 달의 운동을 설명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질량이 다른 세 개의 물체, 곧 m1,m2,m3로 둔 후 계산할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는 m1과 m3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계산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과연 세 가지 작용에 대해 본질적인 차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화폐와 같이 과학의 설명방식은 대상 간의 관계를 합리적으로 창조하고 설명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친 통합과 척도의 부여로 인해 대상의 고유한 성질과 측면을 자칫 단편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달리 말해서 과학은 객관성과 간결성을 중시하는 와중에 필요하지 않은 부분은 과감히 생략하게 됨으로써 그것이 반복될 경우 다른 방향과 관점으로부터의 해석의 여지를 배제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그것은 우리가 생활 속에서 아파트를 ’~원의 가치가 있는 주거 공간‘, 사과를 ’1개에 ~원인 과일‘로 흔히 파악하는 경우가 잦은 것과 비슷하다. 이것은 분명 실용적이며 편리한 사고방식을 촉진시킬 수 있으나, 우리가 궁극적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인문학적 사유와 인간적 방식으로써의 학문에는 부합하지 못하는 면이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4) 문제 : 과학과 유용성, 그리고 현재

 

 지금까지 우리는 앞의 장들에서 찾아낸 인간적 사유의 요소들을 바탕으로 그들이 과학적 사유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는데, 결론적으로 그들에게는 다양한 장점이 있는 동시에 ‘의식의 배제, 기계론적 사유의 극단화, 대상에 대한 편협한 시각’ 등 난점 또한 적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따라서 이 장의 남은 부분에서는 앞서 남겨두었던 논의거리인 유용성의 개념에 대한 간략한 정리를 시도하면서 자연스레 도출되는 여러 문제점들을 알아보아 이어지는 장에서의 탐구를 위한 사전 논의로써 두고자 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유용성의 개념은 태초의 의미에서부터 많은 변화를 겪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것은 고대, 중세, 근대의 세 가지 큰 틀에서 살펴볼 때 가장 잘 드러나는데, 먼저 문자의 탄생과 비슷한 시점으로 돌아가서 생각한다면 그것은 생존이라는 목표와 직결된 양식이다. 예를 들어, 식량을 섭취하기 위해 과일이나 동물 등의 객체를 인식하고 구별하는 것은 동물에 가까운 초기 인간에게 있어서는 배제할 수 없는 능력이었을 것이다.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재료를 구하는 일이나, 더 나아가서 굳이 구체적 사물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가족을 하나의 공동체로 인식하는 것까지도 모두 생존에 직결된 의미로써의 유용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중세에 이르게 되면, 유용성의 의미는 이전의 것을 물론 기본적 바탕으로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문명과 사회가 발달함에 따라 점차 생존보다는 ‘가상적 현실‘, 곧 사상이나 종교 등과 같은 나름의 가치나 의미를 향한 것으로써 특징지어질 수 있다고 본다. 예컨대 당시에도 지금과 같은 다양한 기술과 체계적인 학문이 있었을 것임이 분명하지만, 이들은 과거의 과일이나 동물에 대한 인간의 관심과는 달리 ’실재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은 비교적 결여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세의 기술과 학문의 예시로써 건축술과 신학의 경우를 들어보자면, 전자의 경우 분명 현재의 관점에서 충분히 과학적인 해석이 가능한 실질적인 기술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러한 기술이 향하는 목적과 그 목적이 의도하고자 하는 바를 생각해본다면, 특히 건축술이 주로 적용되었던 성당과 같은 경우, 그것은 극히 종교적이며 사상적인 부분이다. 적어도 그들에게 있어서 높은 건물의 의미는 효율적 주거공간의 확보보다는 신의 영광의 실현인 것이기에, 우리의 이해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기술적 유용성을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후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우리는 학문에서의 유용성을 논할 때 현재의 엄밀한 자연과학적 방법론과 그 실재성에 너무도 익숙한 나머지 모든 학문이 어느 정도의 과학성을 내포하고 있을 때에만 그것을 타당하게 보려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과학적 세계관 자체는 저자가 지적하였듯이 과학 혁명이라는 ’인류에게 진보라는 개념이 등장한 계기‘를 통해 비로소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며 그 이전 사회에서 ’지식의 무지‘나 ’더 나은 세계로의 발전‘과 같은 주장은 생소한 것이었음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있어 진보와 가장 유사한 개념은 이상적인 고전 사회로의 회귀이며 무지는 이미 존재하는 신의 말씀을 통해 해결될 수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기만 하면 된다는, 지금의 관점에서 볼 때 상당히 정적이고 퇴보적인  생각이 그들의 세계관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학을 필두로 한 학문에 있어서 유용성이란 ’신 존재 증명‘과 같은 다분히 사상적인 목표를 이행하기 위한 논리적, 수사적 방법론에 가까운 것이며 근대적 이미지의 유용함과는 동떨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과학혁명과 산업혁명, 그리고 근대 사회의 도래 이후 유용성의 개념은 다시금 변화하였으며 우리의 단어로 표현하자면 보다 ‘실용적’으로 된 것이다. 유용성이란 새로운 것을 창출해내고 미지의 대상을 탐구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었으며, 이론을 실재에 적용하여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는 바탕이 되었다. 다만 이러한 경향은 부정적인 측면 또한 내포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실재 세계에의 효과적 ‘적용’을 중시한 나머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을 곧 유용한 것으로 파악하고는 더 나아가서 해석학과 기계론의 발전을 통해 그것을 옳은 것으로 정당화하는 근대 사회의 근본적 문제점을 야기하였다는 점이다.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 근대적인 사고관, 한마디로 분석적이고 해석학적인 방식은 그것을 수단으로 하여 실재에 대한 효율적인 이해를 돕도록 하는 데에 공헌하였으나, 사실 그 아이디어 자체의 기반은 애초에 인간에게 익숙한 방식으로써의 기본적 유용성의 맥락에 근거를 두고 있다. 예컨대 ‘선 분석 후 종합’과 같은 아이디어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마치 빵을 잘라서 먹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친숙하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필요와 이해의 용이성의 상호작용을 통해 과학은 산업과 함께 근대 세계를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최초의 의미로써의 유용성의 개념은 다분히 변모하였으면서도 여전히 모든 활동의 주인공인 인간,- ‘자신의 영향을 배제한 객관성의 세계를 시도하지만 결국 그것을 주관적으로 이해해야만 하는 주체’ - 속에 유지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른바 ‘과학적 사고방식’이라는 이름의 편견과 문명의 영향을 받은 유용성의 개념은 현대에 이르러 새로운 과학적 난제들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인문학적 사고방식 - 주관이 중시되는 인간적인 사고방식 - 이 소외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우리는 현대적 의미에서의 인문학의 위상을 과학에 대한 상대적 측면에서 일차적으로 탐구한 후 더불어 그 주체성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며, 인간성의 역사적 의미로부터 현대의 인간성을 위협, 혹은 변화시키는 요소들에 대한 평가를 시도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우리의 잠정적 주제라 할 수 있는 ‘인간적 미래’를 생각하게 된다. 

 

 

 

4. 세 번째 : 인문학과 인간 - 인간적인 미래

 

 책 속에서의 인간에 대한 참신한 고찰, 역사 속에 반영된 인간의 여러 특징들, 학문의 발전과 인간의 발전 등 여러 단계를 거쳐 비로소 우리는 논의의 주제의식의 밑바탕을 이루는 주제인 인문학에 대한 탐구로 진입하였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인간성’이라는 주제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다소 편협하며 새로운 방향으로의 해석의 가능성이 충분히 열려 있음에도 그 시도가 다소 미흡함을 발견하였다. 또한 현재 우리에게 지배적인 자연과학적 사고는 필요에 의해 인간을 배제하려는 경향이 큰 나머지, 사회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주체로써의 인간에 대한 탐구를 어렵게 하여 자연스럽게 인문학적 사고를 도태의 길로 이끎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저자의 역사적 고찰을 바탕으로 나름의 생각을 이어온 결과 우리는 현재의 방식이 분명 인간을 척도 속에 몰아넣어 고유한 가치를 말살함과 동시에 우리가 파악하는 세계로부터 의식과 활동성을 빼앗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기에, 그 대안이자 보완책으로써 인문학적 맥락을 동원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며 그것을 합당한 방식으로 다듬어 적용하기 위한 탐구가 이루어져야 함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따라서 나는 이전 장에서 소개한 방식대로, 다시 말해 ‘과학과 현대 사회를 토대로 한 현재 인문학의 의미 - 인문학 자체의 의미와 배경 탐구 - 인간적 미래에 대한 생각’의 순서로 진행할 것이다.

 

 

 (1) 입장의 문제점

 

 우선, 우리는 현재 ‘인문학’이라는 단어가 어떠한 의미에서 통용되는 지를 짐작해 볼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핵심적인 근거는, 현대 사회에서 인문학은 과학에 다소 대립하는 학문으로써 그 이면에 감추어진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해 사용되는 단어로 보인다는 점이며, 더 나아가서는 애초에 ‘과학-인문학’의 구별은 존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인문학을 의미하는 'liberal arts' 조차도 ’자유 예술‘을 의미했을 뿐 어디에도 과학적, 수학적 방법론은 배제한다는 주장은 들어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현재 우리는 고도로 분화된 동시에 치밀한 방법으로 실재 세계에 대해 적용되는 학문의 시대에 살고 있음으로 인하여 이러한 경향을 당연시하고는 한다. 그러나 이 모든 흐름 이전 ’학문‘이라는 것의 발생과 발전과정을 고찰하게 될 때 우리는 무엇이 과학이며 무엇이 인문학이냐 하는 질문이 더없이 무의미한 것임을 깨닫는다. 예컨대 인체를 해부한 후 그림으로 남긴 다 빈치의 업적이 해부학적인 것인지, 미학적인 것인지를 구분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원근법이 사용된 그림이 광학적인 것인지 예술적인 것인지도 마찬가지이다. 기술과 예술에 능통한 자를 ’장인‘으로 취급한 중세 사회나 융합적 지식의 발현을 시도한 르네상스적 인재들만을 고려해 보더라도 우리는 적어도 근대 이전의 사회에 있어서는 인문학이랄 것이 달리 없었으며 모든 것이 과학적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인간 역시 실재의 일부였으며 인간에 대해 탐구한다는 것은 세계를 탐구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곧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 - 과학적이라는 말에서 주관과 인간성을 배제하고 싶어지는 욕구 - 는 심화된 기계주의적 사고방식과 산업 발전의 산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문제적 사실에 직면한다; 우리가 인지하거나 혹은 바라는 인문학의 모든 표상은 극단적 과학주의에 반하여 - 다시 말해 상대적으로 - 생겨나는 측면이 크며 우리는 그것의 필요성을 어렴풋이 인식하면서도 그 자체의 기원과 고유성에 대해서는 모호하게나마 추측할 뿐 이렇다 할 분명한 토대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우리의 상황은 마치 ’1984‘에서 빅 브라더에 반발하면서도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추구하지 못하는 주인공 윈스턴처럼 무언가를 원하면서도 사실은 기존 질서에 대한 생각에 갇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는 ’인문학‘은, 현대에 와서야 생겨난 ’기존 질서에 대한 반발 경향‘으로 보아야 하며 이는 본질적이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자연스럽게 우리를 이 장의 핵심적 과제인 다음 과정, 곧 인문학의 기원과 의미에 대해 종합적으로 살핌으로써 그 주체적인 위상과 필요성을 인식하려는 시도로 이끈다.  

 

 

 (2) 인문학의 본질  

  

  앞에서도 이미 살펴본 바 있듯이 현재 우리의 입장은 인문학에 대한 본질적인 고찰이 어려운 지점에 위치한다. 그러나 문제는 단순히 과학주의의 팽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학문에 대한 우리의 전반적 관점 자체가 수정되는 결과를 낳음으로써 더욱 그 효과가 막대해진다. 따라서 나는 필요한 핵심적 부분을 충분히 언급함과 동시에 지나치게 장황한 논의를 방지하기 위해서 우리의 인문학에 대한 몇 가지 편견을 지적한 후 그에 대한 보충을 통해 나름의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우선, 인문학을 떠올렸을 때 ‘인문학은 무엇을 탐구하는 학문인가?’라는 질문으로써 시작한다면 그것은 오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다 빈치와 같은 종합적 인문학을 실천한 이에 대해  ‘그는 어떤 인문학적 소양을 어디에 반영하였는가?’라는 식으로 궁금증을 가진다면 우리는 단편적인 지식 몇 줄의 참고를 얻을 뿐이다. 사실상 그의 스케치들을 분야별로 분류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그의 생각들을 ‘인문학적인 것과 자연과학적인 것’으로 따로 둘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후의 만찬’이라는 작품을 접함에 있어 우리는 그의 천재적 솜씨에 감탄하면서도, 그 안에 담긴 성서의 내용을 생각하고, 그림을 그릴 당시의 상황에 대해 상상하며, 그림에 적용된 원근법을 찾아낸다. 이들은 분명 그의 그림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그림의 존재의 의미를 이루지만, 여전히 가능한 감상과 응용의 경우 중 극히 일부일 뿐이며 그마저도 감상자에 따라서 달라진다. 말하자면 우리는 하나의 인문학적 결실을 마주할 때 적어도 생물종을 분류하는 방식으로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요컨대 인문학은 일차적으로는 누가 어떠한 생각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의 문제요, 궁극적으로는 누가 어떻게 수용하고 느끼느냐의 문제이다. 그것은 ‘우리 인간’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면서도 결코 인간을 하나의 객체 혹은 덩어리로 취급하지 않으며, 요점은 우리의 주체적인 활동에 있다. 그렇기에 과학에서와 같은 객체 중심의 사고는 인문학에 대해서는 완전히 적합할 수 없는 것이며, ‘분명하되 객관적이지는 않음’이라는 표현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 대해 ‘그렇다면 분명한 위상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학문이 어떻게 굳건히 성립할 수 있는가?’ 따위의 의문이 발생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질문 역시 과학적 사고방식의 강요에서 탈피하지 못함의 결과라고 생각하며, 두 번째로 지적할 부분에 대한 단서를 마련해준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인문학은 존재하되 위치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인문학의 적용’이라는 말을 함에 있어서, 우리는 적어도 과학의 여러 분야가 접목되는 방식을 떠올리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다. 차이를 보이기 위해 나는 메킨토시와 복제양 돌리를 비교해 보고자 한다. 후자부터 이야기하자면, 이는 명백한 생명공학적 결과물이며 말 그대로 기존에 존재하는 생물에 대한 분석에서 그치지 않고 첨단 기술을 동원하여 이론을 실재로 변모시킨 경우이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이것이 두 학문의 성공적 융합이라는 데에 이견을 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 그것이 특별한 이유는  - 이야기로도 많이 알려져 있듯이 - ‘특별한 서체를 장착한 개인용 컴퓨터’라는 데에 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전자의 경우 우리가 그것을 학문적 융합이라고 볼 수 있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복제 동물의 탄생이 생물학적으로나 공학적으로나 큰 의미를 갖는, 다시 말해 두 학문 각각의 본질적 측면에 있어 전반적인 의미를 가지는 공통의 성과라는 점에 있다. 그러나 서체와 컴퓨터의 경우, 다양한 글씨 형태를 표현할 수 있는 컴퓨터가 언뜻 보았을 때 얼마만큼의 혁신을 느껴지게 할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사실, 서체의 표현의 가짓수가 컴퓨터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변화를 가하는 점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토대로 본다면 그것은 차라리 색깔이 특별한 컴퓨터와 맞먹는 수준의 평범함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그 미묘한 차이야말로 소비자의 입장에서 의외의 마케팅 요소로 작용하였으며 이는 컴퓨터를 그 자체로 떼어내어 고찰하기 보다는 사람이 사용하고 인식하는 하나의 물건으로 취급한 스티브 잡스의 지극히 ‘인간적인 접근’에 기인한다. 다시 말해 메킨토시의 핵심은 ‘어떤 글씨체를 탑재 했었는가’가 아니라 ‘스티브 잡스는 어떻게 해서 글씨체를 강조할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원인적 요소와 결과적 요소를 중시하는 과학적 입장, 곧 전자의 사례와는 전적으로 대비되는 부분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인문학의 존재와 적용의 핵심이 그 고유한 영역의 확보를 바탕으로 한 요소와 요소간의 작용보다도, 생각지 못한 부분에 대해 창의적으로 인간적 접근을 시도할 수 있는 태도에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렇듯 인문학적 사고는 분명 무한한 방향으로 적용될 수 있고 그렇게 되고 있지만, 정확히 ‘무엇’을 적용했는지는 쉽게 정리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위와 같은 우리의 편견에 대한 지적으로부터 더 나아가, 지금부터는 보다 인문학의 발생과 본질에 대한 부분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장황하게 표현된 위의 두 가지 사항의 핵심은 결국 ‘인간으로부터 시작해서 인간에게 가는 학문이 인문학이다’로 요약될 수 있는데, 여기서의 우리의 과제란 이 두 가지의 의미를 파악함과 동시에, 그로부터 분명해지는 인문학적 입장을 현실의 과학적 풍조에 어떻게 관계시킬 것인가를 탐구하는 것이다.

 

 먼저, ‘인간으로부터 비롯됨’의 의미는 ‘인간이 원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생각한다. 인문학적 관점에서 인간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분명 한 명의 ‘사람’에서 출발하는 것이지 결코 ‘임의의 개인’이나 ‘호모 사피엔스의 일원’으로써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며, 한 명의 개인으로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기본적 사항이 충족되었을 때 그 다음은 분명 ‘의욕’에 관한 것이리라 본다. 이것은 욕구와는 다른 것인데, 욕구가 보다 생명 유지와 직결된 생물적 의미가 강하며 충족이 필요한 사항이라면 의욕은 그 표출 방식이 예정되어 있지 않은, 달리 말하면 생존의 문제를 넘어서 그 이상의 ‘원하는 것’을 추구할 수 있는 인간적 의미의 가치 창조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 물론 모든 예술적, 인문적 활동이 결국에는 생물학적 욕구의 일환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그러한 식의 논증은 인간적 의미 자체를 부정하게 된다는 점에서 우리의 논의에서는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애초에 인간적임의 의미가 보다 우리의 내적인 창조물, 곧 사고와 사상에 집중되어 있음을 이해한다면 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 . 주어진 환경에서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인간은 그를 통해 자신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냄은 물론, 그 결과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자신도 미처 몰랐던 자신의 일면을 드러내게 되는 데에 인문학적 활동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예컨대 문학 작품이나 회화를 생산해내는 예술가의 입장을 살펴본다면, 그들의 작품은 결코 ‘그냥’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그들은 정신적 측면에서 무언가를 표현하기를 원하고 있으며, 그 생각을 바탕으로 긴 과정에 걸친 창조 활동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제작자가 자신의 작품을 ‘의도’하는 것이 정확한 의미에서의 ‘예측’이라고는 할 수 없기에 - 그림의 경우 어떤 그림을 그릴지는 계획할 수 있어도 그가 몇 번의 붓 터치를 할지는  스스로도 모를 것이며 알 필요도 없다 - 인문학적 창조의 결과물과 그 수용 과정에는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인간의 의도된 생각과 의도되지 않은 특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한 장의 사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같이,- 비록 잉크의 조합이지만 우리는 사진이 무엇을 보여주는 지를 알아보며 우연한 장면의 일시적 포착이기보다는 해당 상황의 반영이자 간직이라고 생각하듯이- 지극히 인간만이 할 수 있으며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적으로, 그리고 다양한 형태와 스케일로 이루어지는 동시에 누군가에 의해 수용될 때, 그것은 결과적으로 우리가 ‘인문 환경’, 혹은 ‘문명적 산물’이라고 부르는 것을 형성하게 된다. 이 산물은 근본적으로 ‘표현’이기 때문에 겉보기에는 구체적이고 물질적으로 축적되어 가면서도,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에 있어서는 결국은 다시 - 아이러니하게도 - 정신적인 것, 곧 ‘의미 있는 인식의 토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문명과 함께 변화를 거듭하며 다시금 ‘새로운 것을 원하게’ 됨으로 인해 인문학은 순환적으로 발전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인문적인 것이란 우리의 ‘원함’에 의해 형성된 의미와 그 표현, 그리고 거기에 다시 영향을 받아 새로운 것을 원하게 되는 우리의 정체성이 어우러지는 것이며, 과학 만능주의 혹은 물질주의적 경향이라는 것은 이러한 의미의 맥락에서 문명을 보지 못한 체 ‘표현‘의 감각적 수용에서 인식이 그치는 이들의 좁은 사고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이렇게 본다면 일차적으로 인문학의 근원적 측면에서 그 의미는 ’인간의 의미 표현 활동을 다른 인간이 수용하는 하나의 과정‘ 에 있는 것이며, 그림에 다시 비유하자면 그림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그린 이의 삶과 그림을 통해 그를 생각하는 감상자 사이의 인간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과 같다.  

 

 더불어, 이를 바탕으로 이번에는 주제의 두 번째 항목, - ‘수용’이라는 말로 위에서도 어느 정도 드러나 있지만 -  곧 ‘인문학은 어떻게 인간을 향하는가’에 대한 부분에 보다 집중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위 내용을 통해 우리는 인문학의 의미를 인간적 의미의 전달 과정과 그에 초점을 맞춘 인간 간의 관계로 파악하였으나, 한편으로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창조자에 대한 수용자의 입장이 수동적이라거나, 혹은 정확히 어떻게 의미를 수용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등의 지적이 있는데, - 사실상 이러한 의문의 핵심 원인은 개념과 개념을 어떻게든 고정적으로 확립한 후 도식적으로 관계 지으려는 일반적 경향에 있다 - 이에 대한 답변이자 주장의 핵심으로써 나는 ‘수용의 과정은 사실상 지극히 임의적이고 자의적이다’ 라고 제시하려 한다. 첫째로, ‘임의성’의 요지는 수용과 창조의 입장이 언제든지 바뀔 수 있으며, 그 둘이 동시에 가능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사실상 문명 사회의 한 인간에게 있어 ‘인문학적 의미의 창조와 수용‘ 이라는 것은 생각하기에 따라 의미가 없어 보일 정도로 당연하면서도 확정짓기 어려운 활동이다. 앞선 내용에서 이러한 과정을 창조와 수용으로 구분한 것은 어디까지나 기본적인 틀을 제시한 것일 뿐, 실제 상황에서는 그것이 복잡하게 얽힌 형태로 동시에 발생함으로써 문명의 지속적인 변화를 유도하게 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심지어는 작용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 또 다른 타자를 가정할 경우 그 활동의 의미는 그에 의해 또다시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비롯되어 강조되는 것이 두 번째 핵심인 ’자의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 사실 방금 전의 경우는 비교적 본질적이지 않은 예시이기는 하다. - 그것의 핵심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자의적‘이다.“라고 함에 있어서의 개인의 자발적인 부분을 인정하는 것과 동일선상에 있기는 하면서도 더 정확히는 ’의미 전달이 이루어지는 상황 속에서 창조자와 수용자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라는 부분에 대한 고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요컨대 하나의 인문학적 결실이 진정으로 ’자의적‘일 수 있는 이유는, 창조자가 자신의 의사에 따라 창조하고 수용자 또한 자기 나름의 수용활동을 한다는 점에서 더 나아가 ’둘 중 하나가 실재하지 않더라도 나머지 하나가 다른 하나를 가정함으로써‘ 성립할 수 있다는 데에 있는데, 이에 대한 예시로써 우리는 두 가지 상황을 가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다빈치의 그림을 감상하는 ’나‘는 수용자이다. 나는 다빈치에 대해 알고 있으며 그림의 배경 스토리 또한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러나 다빈치는 당연히, 더 이상 ’실재‘하지 않는다. 내가 경험하고 있는 것은 분명 다빈치라는 창조적 인물의 결실에 대한 수용 활동이지만, 그것은 결코 실존하는 두 개인의 소통은 아니다. 나는 그의 결실을 통해 하나의 의미로써 창조자인 그를 ’가정’할 뿐이지만 그것은 나의 자연스러운 ‘자의적’ 수용활동의 일부로써 무리 없이 이해될 수 있다. 반면, 비극을 창조하는 극작가의 경우를 보자. 그는 장래의 ‘관객’을 염두하고 작품을 쓰고 있지만 그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고 그저 그의 작품을 감상하게 될 것임을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 또한 그의 자의적인 작품 활동에 전혀 장애가 되지 않으며 그가 관객의 반응을 생각하며 작품을 기획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자의성이란 ‘경험하는 주체에게 있어서는 분명한 것이되 확정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인문학적 특성을 온전히 반영하는 것이며, 달리 말해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만들고, 보고, 느끼는 것이다. 물론 과학적 객관성의 측면에서 이러한 내용은 용이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그럼에도 우리는 충분한 인문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그들만의 일관적 해석에 대한 맹목을 방지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우리는 ‘인문학적 적용’의 양상은 위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듯이 과학의 각 분야가 ‘협력’하는 것과 같은 종류이기 이기 보다는 인간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것임을 견지해야 하며, 이렇게 할 때 학문에 대한 우리의 인상은 자연스럽게 ‘주관을 배제한 체 대상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시선’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판단하는 주체의 행동’으로 변화함을 느낄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 모든 내용을 종합하여 볼 때 인문학은 하나의 고정적인 학문이기 보다는 탐구의 활동에 생각을 가지고 참여하는 우리의 인간적인 입장, 그리고 그것이 역사 속에서 반영되어 온 사례를 고찰함으로써 물질적 대상조차도 ‘실재’가 아닌 ‘의미’로써 볼 수 있는 능력이며, 자연과학을 비롯한 분야를 막론한 다양한 학문에서 ‘인문학적이다’라는 표현은 거리낌 없이 사용될 수 있음이 당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컨대 ‘부분과 전체’에서 하이젠베르크가 원자에 대해 생각함에 있어 ‘언어의 한계’, ‘플라톤의 소립자론’, 그리고 ‘불확정성을 유발하는 관찰자’ 등을 떠올릴 때 그는 전적으로 인문학적인 사유를 하고 있는 것이며, 자연과학의 최전선에서의 탐구가 이제 더 이상 인간의 직관에 부합하지 않는 먼 세계를 다루고 있음을 보여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러한 상황이야말로 인문학적 태도의 적용을 요하는 시점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3) 결론 : 인간적 미래

 

  인간성의 의미, 과학, 인문학적 사고방식 등을 다룬 본 감상문의 핵심은 물론 ‘인문학’이라는 단어에 무게를 두고 있으나, 애초에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으며 미래 지향적인 문제의식의 비중 또한 크기에, 그러한 논의의 결과를 바탕으로 현실을 바라보는 과정 없이 우리는 진정으로 인문학을 고찰하였다고 하기 어려울 것이다. 더욱이, 최근에 들어 집중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인공지능을 필두로 한 인간의 의식에 대한 문제를 비롯하여 ‘인간 스스로가 원하는 인간’의 실현이 기술적 도움을 토대로 가시화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새로운 시대속 인간성의 변혁의 가능성에 반응하는 ‘인간적인 미래 창조‘를 심각하게 다루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나는 이들이 현대 사회의 중요한 과학적 시도들로써 충분한 의미와 혜택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결코 배제하지 않지만, 적어도 그 탐구의 대상이 이전의 그 어떤 것들에 비해서도 사회적 파장의 측면에서나 인간에 대한 근원적 측면에서나 영향력이 있을 것이라 판단하기 때문에 보다 예상치 못한 결과들의 가능성, 혹은 부작용들에 조금 더 무게를 두고자 한다.

 

 현재 우리의 상황을 논함에 있어 다루고 싶은 가장 주요한 문제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인간의식의 ‘역설계’가 진행됨에 따라 생겨나는 인간적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 그리고 생명 연장 기술의 발달에 따른 영생 추구의 결과에 대한 논란이 그것이다. 먼저 전자의 경우, ‘역설계’란 현재 존재하는 인간의 의식의 발생과정과 작동방식을 과학적으로 추적하여 지능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시작해서 궁극적으로 인간에 맞먹는 수준의 의식을 재현하는 것인데, 물론 적어도 한 세기 내에는 - 미치오 카쿠의 ‘마음의 미래’ 참고 - 완벽히 실현되기 어려울 것으로 과학자들은 보고 있다. 그러나 이미 그 기반이 되는 연구결과들이 성공적으로 도출되는 사례들이 순조롭게 이어지고 있으며, 그들의 궁극적 목표가 최소한 ‘가능은 한 것’이라는 확신이 서는 한 언제까지고 내버려 둘 수만은 없는 문제임이 확실하다. 앞선 장에서 언급한 모든 ‘인간적 사고와 적용’들은 사실상 인간의 ‘고유한 정체성과 의식’을 전제해야 하는 것임이 분명한 이상, 만약 인간의 의식이 마치 파일을 업로드 하듯 컴퓨터 등에 ‘저장’ 될 수 있는 시대가 온다면 인간의 삶의 의미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종류의 것으로 변모할 것이며 그때 우리는 혼란 속에서 ‘인간성’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고민해야만 할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더욱 심각한데, 저자가 ‘길가메시 프로젝트’로 소개한 이 연구는 궁극적 목표가 ‘자연상태에서 불멸인 인간’을 창조하는 데에 있다. 이것은 ‘수명 연장’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이며, 사실상 인간이 인간에서 탈피하여 그 이상의 존재, 혹은 ‘신’과 비슷한 것으로 향하려는 시도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죽음의 가능성 자체가 배제될 경우 ‘삶’이라는 개념 자체에 혼란이 생길 것임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결과이며 이는 인간의 의미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할 것이다. 죽음은 피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죽음이 있음으로 하여 삶이 비로소 드러나고 인간이 무엇인가를 필사적으로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은 유수의 철학자들도 줄곧 동의해온 사실이다. ‘인간은 자신이 죽을 것임을 아는 이상 언제라도 진정으로 여유로울 수는 없다’라는 말도 있지만, 이는 반대로 말하면 죽을 수 있기 때문에 행동할 수 있다는 것과도 같은 의미일 것이며, 만약 죽음을 잊은 인간이 어느 정도까지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에서의 인간으로 남을 수 있을지, 그리고 인간적 삶의 추구를 도모할지는 논란의 여지가 다분하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취해야 할 바람직한 입장이란 무엇일까? 아니면 조금 더 극단적인 경우를 가정하여, 과학적 기술과 세계관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시대를 마주한 우리에게 인문학적인 것, 혹은 인간적이라는 것이 얼마나 더 오래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이러한 당장의 문제들에 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현실적인 측면에서 인문학과 인간성이 살아남기 위한 ‘고려의 원칙들’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현실적 미래 세계에서의 인간적 학문과 삶의 유지 가능성의 근거가 되는 생각들이자 그러한 유지의 노력 자체는 또다시 왜 의미를 갖는가를 설명할 수 있게 하는 바탕이다.

 

 첫째로 우리가 유념해야 할 부분은, 인간은 정신적으로 특별한 존재인 와중에도 여전히 육체적인 부분에 의해 크게 영향 받는, 다시 말해 정신과 육체를 모두 포함하는 존재로써 파악되어야 할 존재라는 점이다. 육체 없는 인간은 존재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해서 물질적으로 육체만이 존재하는 인간을 인간이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 인간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측면 - 그것이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간에 -은 그의 존재의 반영이며 그 전제로써 당연히 우리는 그가 일관성 있게 그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몇 가지 문제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들은 대체로 ‘의식 또한 결국 신체의 기능에 의해 촉발되는 육체에 종속된 것이다.’ 라든지, 아니면 ‘인간을 육체와 정신의 종합으로 본다는 식의 주장을 해도 결국 그것은 관찰자의 입장에서 ’개체‘를 바라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식의 것인데, 이러한 반론들은 일면 타당하면서도 충분히 우리의 주장에 포섭될 수 있는 것들이다. 먼저 첫 번째의 경우에 대하여, ‘인문학적, 혹은 인간적인 것은 인간의 주체적인 의미 창조에 관한 것’이라는 우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정신’은 과학자들이 말하는 ‘뇌의 환상’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세계를 인식하고 의미를 만드는 그 내적 과정’에 가까운 것이며, 육체 또한 단순히 ‘공간 어딘가에 위치하는 고깃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고 경험하는 나 자신의 일부’이다. 한 번 더 말하자면, 과학적인 측면에서 그들이 ‘정신’이라 부르는 것이 어떻게 발생하든지 간에 결국 인간이 알고 있는 의미에서의 정신이란 것은 ‘그가 느낄 때에만’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적 의미에서의 정신은 정확히 말해 ‘생각’이지 ‘의식’이 아니다. 또한, 육체의 경우 우리가 ‘손’을 이야기 할 때 과학적인 입장에서 그것은 ‘손을 이루는 모든 요소들의 집합체이자 그 전체로써의 손 자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나에게 있어 그것은 단순히 ’손‘, 혹은 ’손가락이 달린 손‘ 일 뿐 그 이외의 방식으로 - 세포가 몇 개라든지, 혈류의 흐름이 어떠하다든지 - 파악될 리는 없다. 더군다나 그것은 정상적인 생활기능을 가진 한 인간의 의식과 의지가 개입하여 작동하는 것으로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독립된 관찰대상이 아닐뿐더러 타인에게 있어서도 그것은 ’한 인간의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쉽게 훼손될 수 없는 것이다. 즉 이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에서 모든 것은 인식되는 한 실재 이상의 ’의미‘로써 존재하는 것이다(1984 독후감 참고).”라는 결론을 내리게 하는데, 이것이 자연스럽게 두 번째 의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 인간적 삶에 있어서 존재의 뜻이 ’의미‘에 있는 것이라면, 사실상 한 인간을 종합적인 것으로 고찰함에 있어 그를 과학적 의미로써의 ’개체‘로 대하기란 넌센스가 되어버린다. 한 가지만 예시를 들어서, 내가 친구를 마주함에 있어 개체로써의 그는 그 자리에 있을 뿐이지만, 의미로써의, 다시 말해 존재로써의 그는 나의 기억과 사진 등에 다양한 형태로 보존되며 누군가 그것을 그를 떠올리기 위한 충분한 의미의 매개로써 인식한다면 그 누군가에게 있어 그는 충분히 거기에 ’있다‘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직접 마주하는 경우에 한해서 나는 그 친구가 거기에 ’실재‘한다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상의 일련의 생각들을 통해, 우리는 도입부에서 제시된 두 가지의 문제점 중 첫 번째 것에 대한 답변의 근거가 마련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인간은 일차적으로 의미로써 고찰되는 존재이며 ’그 자체이지만 어디에도, 누군가에게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며, 이는 인간 의식의 독립적 설계 및 육체로부터의 가분성 연구의 미래에 있어서 -기술적 맥락 그 이상으로 - 결코 인간의 본질적 맥락은 훼손되기 어려움을 보장한다.

 

 또 다른 하나의 문제 - 영원한 삶 - 는 우리를 더욱 막다른 골목으로 이끄는 듯하나 현실적 측면에서 볼 때 이것은 오히려 답하기 쉬운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말하자면 ‘인간이 죽지 않게 된다.’라는 말에는 ‘생물학적으로’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고 혹은 기타 위험요소에 의해 희생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이전과 다르게 고려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저자도 지적한 바 있듯이, 사회를 무시한 채 생명에 대한 위협이 두려워 방 안에 갇혀 있을 수만도 없는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력을 부여할 경우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한 것이다. 죽음을 원칙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사실은 결코 죽음으로부터의 완전한 도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죽음의 위험을 우리는 더욱 인식하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더불어, 이로부터 더 나아가서 생각한다면 우리는 ‘영원한 삶’이 어떻게 보면 ‘정해진 삶’이라는 점을 실감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진정한 삶의 의미가 그 유한성으로부터 비롯되는 ‘무한한’ 인생에 있어서의 창조활동에의 의욕에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인간은 ‘언젠가’ 죽어야 할 것을 알면서도 ‘언제’ 죽을지를 모르기 때문에 삶을 스스로 영위할 동기를 부여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만약 그가 영원성을 획득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가 ‘언젠가’ 죽지 않는다는 문제의 해소이기보다도 ‘언제’ 죽을지의 의미가 사라진다는 점에서 문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아주 긴 삶’과 ‘영원한 삶’의 질적 차이란 단순한 길이가 아닌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삶의 의미와 의욕을 잃은 인간에게 있어 이상, 목표, 후손 등의 문제가 어떻게 남겨지게 될 지는 미지수이다. 간혹, 인간의 본능적 욕구에서 비롯된 ‘길가메시 프로젝트’를 ‘신이 되기 위한 인간의 도전’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는데, 참고로 말하자면 이는 지극히 편협하고 이해하기 힘든 처사라고 생각한다. 위와 같은 주장이 일면 타당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단지 “신은 인간에 비해 상상 이상으로 우월한 존재이다”라는 관념 이상의 것을 우리가 생각하지 않고 있기 때문인데, 무엇보다도 신을 가정하고 비교하는 인간이 - 단순히 그들 입장에서 생각한 ‘우월함’의 일부를 장착하는 것만으로 - 신적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에서부터 충분한 넌센스이며 신이 ‘된다’라는 것과 ‘신’이라는 단어의 맥락을 도대체 어떠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도 불분명하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우리의 기본적인 욕구를 맹목적으로 추구함에 있어 ‘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가치를 부여하는 한편, 우리가 생각하기에 ‘신적인 것’들의 일부를 추구하는 이 자의적 활동을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 그것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어떻게든 신과 같은 존재로 변모시킴으로써  - 우리는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무언가 ‘새로운 시대의 인간’의 지평을 열게 되고 - 부차적인 문제들은 ‘새로운 인간’의 능력에 의해 해결될 것이라는 일반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생의 추구는 - 적어도 지금의 시각에서 보자면 - 인간이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 것임을 분명히 암시하고 있으며 인류가 그 실현 과정의 도중에 충분히 그것을 자각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로써 우리에게는 어떻게 하면 보다 ‘인간적인’ 미래를 창조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만이 남게 되었는데, 나는 이에 대해 앞선 두 차례의 답변의 요지와 저자의 결론을 통해 도출되는 ‘인간성과 인문학’에 대한 최종적 주장을 바탕으로 답변함으로써 모든 논의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먼저, ‘인문학’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성립하는 의미’ 이다. 앞선 논의들에서 우리는 인간에게 있어서의 인식의 뜻과 하나의 인간이 존재함이 의미를 가지는 과정 등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는데, 결국 이 모든 것을 종합할 수 있는 핵심은 ‘의미란 인간이 스스로 인간에 대해서 만들어 내야 하는 것’ 에 있다. 따라서 이로부터 우리는 자연스럽게 인문학의 의미가 ‘타자’, 곧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가정해야만 성립하는 것이며 의미의 창조자를 생각하지 않는 단순한 감각적 고찰은 물질 만능주의적 세태의 한 국면임을 -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 알 수 있다.. 결국, 인간과 인간이 실재함에 더불어 서로에 대하여 ‘존재’하고, 그에 따른 의미가 창조되어 전달되는 하나의 순환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적 삶’이며, 이때 모든 과정의 최소 단위이자 중심은 세포도, 원자도, 육체나 정신도 아닌 하나의 ‘인간’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 그것은 마치 물리학에 있어 소립자를 연구하고 그 결과를 이해시키는 연구와 강의에는 인문학이 있지만 그 속에서 사용되는 수식이나 원리에는 ‘인간적 의미’란 없음과 같다. -.

  

 그리고 이러한 인간적 삶의 맥락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역사와 미래에 적용될 수 있다. - 라고 적어도 나는 생각한다.- . 다만 우리는 이 과정에 있어서는 한 가지 핵심을 유념해야만 하는데, 그것은 바로 임의적으로 진행되는 역사적 맥락의 특징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책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인터넷의 등장을 예시로 든 바 있는데, 언급의 요지란 역사에 있어 상상이 실현되는 경우는 사실 그렇게 흔치 않지만(은하계 여행 등)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의 혁신은 더욱 빈번하다는 것으로 나는 이 말이 인문학적 세계관이 현대 사회에서 기능해야 할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인간적 의미와 가치’를 중시하는 인문학은 사실상 ‘인터넷’ 보다도 ‘우주여행’에 가까운 것으로, 달리 말해 그것은 이상인 동시에 우리에게 있어 ‘흔들리지 않는 본질적인 것’이다. 물론 그 이상 자체도 과학에 따라, 시대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는 지적이 있을지도 모르나, 나는 적어도 모든 창조에는 인간적 의도와 인문학적 사고가 깃들어 있다는 점과 더불어 인간이 애초에 그의 시대만을 살아갈 수밖에 없음으로써 이상은 적어도 모든 실존하는 이에게는 각각의 의미로써 ‘영원’ 하다는 점을 강조해 두고 싶다. 이상적이며 현실 그 이상의 가치에 대한 것이라 하여 현실 ‘이외’의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며, 인문학적 사고의 진정한 실현은 과거를 고찰하고 현재를 파악한 후 미래를 그린다는 일련의 과정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비록 이것이 지나치게 상투적인 표현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핵심은 그 탐구의 시각이 현재의 어느 한 지점에 갇혀 있거나 탐구 대상 그 자체에 국한된 지엽적 지식추구의 활동을 위한 것이기 보다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창조의 배경과 과정’을 고찰하는 ‘인간적 시각’이라는 점에서 차별화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만약 이것으로도 설명이 부족하다면 나는 과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말을 위의 내용에 대한 하나의 함축으로써 제시하고자 한다 - “과학의 시대에 철학은 직접적인 탐구 과정에 관여하기보다는 분화되는 탐구의 시각들을 한데 모아 고찰함으로써 그들을 의미 있게 종합해 나가는 사명을 띠고 있기에 의미가 있다.”  



유발 하리리 <사피엔스>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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